[조선의 고궁]

조선시대 고궁-경복궁

경복(景福),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로부터 첫 번째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개국 3년 만인 1395년 완공된 궁궐은 390여 칸으로 한양의 중심축에 자리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등 뒤로는 주산(主山)인 북악산을 두었고 궁의 정면인 광화문 밖으로는 육조 거리를 두어 시가지를 만들었다. 그 앞쪽에는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었고,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렀다. 새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궁(法宮)이 자리하기에 더없는 명당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길한 기운 덕일까 새 왕조는 영욕의 시간 가운데 무려 600년이나 이어졌다. 다만 경복궁의 역사는 그러하지 못했다.

1553년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강녕전에서 시작한 불길은 근정전(勤政殿) 북쪽 대부분을 태운 후에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듬해 복구가 이뤄졌고 전소의 수준은 아니었다. 경복궁이 완전히 불타버린 건 임진왜란(1592년) 때 왜군의 소행으로 짐작한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그 터가 길하지 못하다고 해 창덕궁에게 법궁의 지위를 넘겨준 채 방치됐다.

경복궁이 되살아난 것은 그로부터 270여 년이 지난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였다. 대원군은 330여 동, 7225칸 반의 경복궁을 중건함으로 왕권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이것이 조선 왕조가 이룬 경복궁의 마지막 영화였다. 1876년에는 대화재로 교태전 등 내전 다수가 손실됐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최고의 법궁, 경복궁은 철저하게 해체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려 전각의 90%가량이 철거됐고, 1917년에는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경복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창덕궁의 내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고, 심지어 1926년에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으며, 건청궁에는 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경복궁 훼손의 방점을 찍었다.

광복 후 경복궁이 다시금 부분적이나마 복원을 시작한 것은 1968년이었다. 우선 한국전쟁 때 불탔던 광화문이 불완전하게나마 복원됐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됐다. 1995년에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 근정전의 앞길을 열었다. 2007년에는 건청궁의 복원이 완료됐고 2010년 광화문을 원래대로 이전하는 작업이 완료됐다.

경복궁을 대표하는 근정전과 경회루

근정전(勤政殿)은 국보 제223호로 경복궁의 법전(法殿, 왕이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영을 내리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궁전)으로 각종 즉위식을 거행했던 왕실의 행사장이었다. 조정(朝廷)의 화강암 바닥에는 품계석이 차례로 도열해 있으며 그 너머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내부의 중심에는 임금의 옥좌가 놓여있으며, 그 뒷면으로 임금의 위엄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달과 해 앞의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으로 장엄한 느낌을 준다)가 그려진 병풍이 놓여 있다.

근정전의 옆에는 경회루가 있다. 경회루는 1만원권 구화폐 실릴 만큼 대표적인 건축물로 사랑받아 왔다. 네모반듯한 연못 안에 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3개의 돌다리가 뻗어 나와 호수 밖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경회루의 모습은 간결하면서도 호화로운 한국 전통의 건축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근정전을 지나면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思政殿)과 왕의 침실인 강녕전(康寧殿),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交泰殿) 등이 자리한다. 근정전 지나 궁의 서쪽에는 수정전과 경회루가, 동쪽에는 동궁과 자경전, 국립민속박물관 등이 있다.내전 건물이었던 만경전(萬慶殿)은 원래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경복궁의 후원인 향원정

궁궐북쪽에는 수변공간인 향원정이 있다. 고종이 경복궁의 옛 후원을 새롭게 조성한 곳인데 연못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gazabo)를 지어놓은 구조이다. 향원정(香遠亭)은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의미로, 섬을 잇는 취향교(醉香橋) 또한 '향기에 취한다'는 의미의 목조다리이다. 경회루가 국왕의 정식 연회공간이었다면 향원정은 휴식이나 풍류를 즐기던 왕실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던 건청궁

건청궁은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지은 궁궐 안의 궁궐이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의 슬픔이 서려 있다. 건청궁에는 고종이 머물렀던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거주했던 곤녕합 등이 자리하고 있다. 1887년에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된 곳이기도 하다. 건청궁 안에는 재현된 궁중생활용품들을 함께 전시해놓고 있다. 건청궁은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문화재청의 살아 숨쉬는 5대궁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2010년 8월 일반에 공개했다.

다시 서는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 남쪽에 자리한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에는 세 개의 홍례문이 있는데, 중앙의 문은 왕이 출입하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출입하는 문이었다고 한다. 일본통치시대와 한국전쟁 때에 훼손을 겪었다. 경복궁 복원사업을 위한 조사 중 훼손으로 인해 원래 위치마저 옮겨진 것이 발견되어 원 위치로 옮겨 복원공사를 진행하였으며 2010년 8월 15일 완전히 복원된 모습이 공개됐다.

홍례문(弘禮門)

홍례문은 광화문을 지나 처음으로 마주치는 문이다. 경복궁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문으로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통치시대에 조선총독부 건설로 파괴되어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야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 최고의 궁궐인 만큼 생각보다 넓다. 정해진 코스는 없지만 근정문과 근정정을 지나며 좌우로 숨어든다. 동선은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다만 좀 더 자세한 관람을 원한다면 우리궁궐지킴이 해설사들의 설명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첫 방문자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굳이 몇몇 장소를 꼽으라면 조선 건축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국보 제224호 경회루와 그에 비해 여성적 수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궁궐 북쪽의 향원정, 교태전 뒤 왕비의 후원인 아미산의 굴뚝(보물 제811호)이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우니 꼭 한번 둘러볼 일이다. 고종이 기거했던 건청궁도 있다. 건천궁은 문화재청에 의해 지난 2006년 복원됐으나 그간 하루 3차례 제한적으로 관람객에게 공개되다 2009년 1월부터 전면 개방되었으므로 모처럼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들러보길 권한다.

※ 추천 관람 코스
- 홍례문 ▶ 근정전 ▶ 교태전 ▶ 자경전 ▶ 향원정 ▶ 신무문 ▶ 청와대 촬영 ▶ 경회루


경복궁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각마다 궁궐의 문을 개폐하고 경비와 순찰 업무를 담당했던 수문군의 수위의식과 수문장 교대의식이 재현되어, 당시 왕궁을 지켰던 수문장들의 절도 있는 의식을 직접 눈으로 관람할 수 있다. 수문장교대의식은 10분 내외로 이루어지지만, 교대의식 후 흥례문 앞에 서서 수위의식을 진행하고 있으므로 기념촬영 등은 가능하다.

MBC 드라마 < 해를 품은 달 >

  • 방송기간 : '12.1.4.~'12.3.15.
  • 줄거리 : 조선시대 가상의 왕 이훤(김수현 분)과 비밀에 싸인 무녀 월(한가인 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궁중 로맨스드라마
  • 방송장면 : 왕 이훤(김수현 분)과 신하 형선(정은표 분)이 취향교에서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등장
  • 한류이슈 : 제18회 상해 TV페스티벌 해외TV시리즈 부문 은상 수상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해외 7개국으로 수출
  • 배우 김수현 :
    드라마 < 자이언트 >, < 드림하이1 > 등으로 인기를 얻으며, 차세대 한류스타로 등극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김수현의 모습
해를 품은달의 포스터 김수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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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가 깃든 궁

한때는 창경원(昌慶苑)이라고 했다. 동물원이 있었고 식물원이 있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됐고 오랜 시간 유원지 역할을 했다. 가장 처절하게 훼손된 궁궐이 경희궁이라면, 가장 처참하게 변화한 궁궐은 창경궁이었다. 다행히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이름도 다시 창경궁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창경궁이 지어진 지 꼭 500년 되던 해의 일이다.

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서 창덕궁의 동쪽에 세웠다. 그 기초는 세종이 닦았는데 세종은 즉위하던 해에 고려 남경의 이궁 터인 지금의 창경궁에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성종은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들을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과 문정전, 환경전, 경춘전 등 대부분의 전각이 이때 지어졌다.

창경궁은 자연스레 창덕궁과 이어졌으며 두 궁궐은 굳이 구분을 두지 않았다.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됐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했다. 이후에는 창덕궁이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 창경궁의 쓰임이 늘어났다. 보통 궁궐은 남쪽에 정문을 세우지만 창경궁은 동쪽에 정문이 있는 것도 창덕궁과의 연계성을 고려한 배치인 듯하다. 그밖에도 기능과 용도 면에서 생활의 편의를 고려한 흔적이 많다. 하지만 1830년 환경전 화재로 내전들이 불탔고 1907년에는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되고 순종의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긴 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변질돼 일반에 공개하면서 궁궐의 권위가 추락했다.

가장 오랜 정전, 명정전(明政殿)

동쪽의 제일 바깥쪽에는 보물 제384호 홍화문(弘化門)이 있다.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보다 2칸 작은 3칸의 누각이지만 정감이 넘쳐난다. 실제로 영조와 정조는 홍화문 앞에서 일반 백성들과 만나기도 했다. 홍화문을 지나서는 옥천교(玉川橋)가 나오고 명정문(明政門)에 이른다. 홍화문의 행랑은 사각의 울타리를 이루며 한층 높은 지대에 있는 명정문과 만나고, 명정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명정전(明政殿)까지 이어진다. 창경궁은 홍화문과 명정문, 명정전이 계단식으로 지대를 높여가며 자리한다. 이는 창덕궁과 비슷한 형태다.

특히 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전이다.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정전 뒤쪽으로는 왕이 정무를 보던 문정전(文政殿)이 있다. 문정전은 명정전과 직각을 이룬 채 자리하는데 창경궁에만 있는 독특한 구조다. 일제강점기 때 헐렸던 것을 지난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했다. 가까이에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었던 숭문당(崇文堂)이 있다. 숭문당 바깥으로는 함인정(涵仁亭)과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이 'ㄷ'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경춘전은 성종 때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쓰였으며, 경춘전과 떨어진 북쪽의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은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

궁궐의 북쪽에는 춘당지가 있다. 왕이 농정을 살피며 직접 농사를 짓던 장소다. 지금은 두 개의 연못이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본래의 춘당지다. 큰 연못은 왕이 농사를 짓던 11개의 논이 있던 자리로 1909년 일제가 연못을 조성해 배를 띄우고 유원지를 만들었다. 그 너머로는 대온실이 있다. 같은 해에 지어진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지었지만 창경원을 만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창경궁에는 내전 터, 동궁 터, 궐내각사 터 등 빈 터가 많다. 다시금 회복해야 할 우리네 궁궐이요,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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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천 년 광화문 연가

덕수궁 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는 1593년 행궁에서 승하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행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해 이전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했다. 후에는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했다. 1623년에도 경운궁을 무대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仁祖)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이다. 인조 역시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왕이 된 지 8일이 지나 창덕궁으로 다시 이거했고 그 후로는 별궁으로 점점 노쇠해갔다. 1773년 영조 49년에 선조를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치른 적이 있지만 궁궐로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종 때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환궁할 때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인 경복궁을 뒤로하고 열강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대한제국(1897)을 세웠고 경운궁도 다시 궁궐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도 잠시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일제의 탄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고, 2년 후인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이뤄졌다. 순종은 왕위에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궁했고 고종이 기거하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했다. 덕수(德壽)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후 정종은 태조의 거처에 상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덕수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 후로는 상왕의 거처라는 의미를 가진 궁궐을 덕수궁이라 했다. 어떤 이유든 스스로 물러난 태조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온 고종의 처지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덕수궁 본래의 이름인 경운궁을 회복하자는 의견도 그에 기인한다.

쓸쓸한 이름, 덕수(德壽)

덕수궁에 들어가기 위해 대한문을 지난다. 수문장교대의식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멎는 명소다. 태평로의 상징이다. 하지만 원래의 위치는 아니다. 일제에 의해 태평로가 만들어지면서 덕수궁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대한문도 뒤쪽으로 물러났다. 대한문(大韓門)의 옛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 이 또한 경운궁의 정문은 아니었다. 중화전 앞쪽의 인화문(仁化門)이 정문 역할을 했으나 지리적 조건이 좋지 않아 대안문이 그 기능을 대신했다. 그 후 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거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안(安)’의 글자 모양이 갓을 쓴 여자를 닮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친일파 수양딸을 의미했기 때문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지만 고종의 독립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대한문은 1968년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또다시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괜스레 너른 태평로가 무심하다.

대한문을 지나 직진하면 중화문(보물 제819호)에 이른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입구로 인화문이 정문이던 시절에는 궁궐에서 만나는 첫 건물이었을 게다. 중화전 앞에는 정전답게 품계석이 도열해 있다. 중화전은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 후에 단층으로 중건됐다. 화재는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보물 제820호)의 온돌 공사 중 일어났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실로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궁궐 내 목조중층 건물인 석어당도 주목할 만하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역사다. 임진왜란 때 환도한 선조가 머물다 승하한 장소요, 인조반정 후 광해군이 유폐된 장소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게 특징이다. 물시계가 있는 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는 덕수궁 내 유일한 국보다. 창경궁에 있다가 옮겨왔다.

덕수궁은 궁궐 안에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석조전은 우리나라의 20세기 초 서양식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서편의 서관은 1936년 이왕가미술관으로 지어졌고 현재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두 건물 사이의 분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분수다. 이처럼 덕수궁에는 그저‘궁궐’로만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사연들이 남았다. 하지만 이 또한 경희궁과 덕수궁, 평리원(현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 사이에 구름다리(홍교)가 있었다는 기록처럼 아련하다.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인 듯하지만 우리의 민족사를 가로지르는 회한의 역사인 것을…. 이제 상왕의 강녕을 기원하던‘덕수(德壽)’는 후손들이 간직해야 할 사명으로 남았다.

석조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

석조전에서 바라본 전경
석조전에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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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보존하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은 서울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먼저 종묘가 선정됐고 이어 창덕궁이 등재됐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이자 세계가 함께 보존하고 지켜가는 문화재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은 진정성과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전제로 한 10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 이상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창덕궁은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어진 궁궐로 전체 면적의 2/3가 북악산의 응봉산 자락에 있다. 산세를 적절히 활용한 궁궐인 셈이다. 창덕궁 후원의 가치가 각별한 이유도 이같은 자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건축과 조경의 특징이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에 의해 세워졌다.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장 오랜 시간 법궁(法宮)의 역할을 한 궁궐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창덕궁을 모두 잃었다. 그 후 경복궁은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방치됐고, 광해군 2년(1610)에 재건된 창덕궁은 약 270년간 조선의 법궁으로 쓰였다. 이웃한 창경궁과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고 사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 궁궐이 그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됐다.

1917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내전의 대부분이 손실되고 말았다. 이에 일제는 창덕궁을 복원한다는 미명 아래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서 사용했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을 허물어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 등을 지었다. 창덕궁과 경복궁을 동시에 훼손시킨 것이다. 순종의 승하 이후에는 더욱 심하게 훼손됐다. 창덕궁은 1991년에 들어서야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를 다시금 입증했다.

옥류천에서 낙선재까지

창덕궁은 1960년 일반에 개방했다. 하지만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3년간 폐쇄했고 1979년부터 오랜기간 안내원 제도를 시행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여타의 궁궐과 달리 안내원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자유로운 관람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창덕궁 관람이었다. 그러나 2010년 5월부터 관람제도가 바뀌어 현재는 자유로이 관람이 가능하다.

창덕궁은 크게 두 가지 관람 프로그램을 가진다. 첫 번째는 일반 관람이다.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을 중심으로 낙선재(樂善齋)까지 아우르는 기본적인 관람 코스다. 또한 안내원의 통제 없이 궁궐 곳곳을 자유로이 감상할 수 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쓰이던 공간이다. 검소한 헌종의 생활과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소박한 단청과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창살과 벽체 무늬가 두드러진다. 곁에 있는 석복헌(錫福軒)은 경빈의 처소로 궁궐 안에 후궁을 위해 건물을 지은 건 이례적이다. 낙선재에는 수강재(壽康齋)도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덕혜옹주의 거처였다.

두 번째는 후원 특별 관람으로 후원의 초입 부용지에서 후원의 백미 옥류천에 이르는 코스다. 후원은 창덕궁의 뒤편에 자리한 궁궐 정원으로 일제에 의해 비원(秘苑)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후원이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다. 북쪽에 있다 하여 북원(北苑)이라고도 한다. 후원의 아름다움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데에 있다. 생태계의 보존 상태가 좋고 연못과 정원 등에는 차경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옥류천은 그 제일 안쪽에 자리한 계곡으로 인조 14년(1636)에 소요암을 깎아내고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도 했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새긴 옥류천(玉流川) 세 글자가 또렷하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이 자리한다. 그 가운데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인 정자로 주변에는 왕이 직접 농사를 지은 논이 있다.

돈화문 전경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전경

인정전 외관 전경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인정전 측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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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와 운현궁 한 바퀴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를 지나면 대로에 긴 한옥 담이 보인다. 담 너머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조선 말 정치의 흥망성쇠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경복궁의 중건, 서원 철폐, 세도정치 개혁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원군의 섭정 10여 년 동안 사실상 조정(朝廷)과 같은 역할을 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곳으로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 말기의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이 보인다. 예전에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수직사(守直舍)다. 현재는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솟을대문 안쪽에는 노안당(老安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이 칠해 있지 않아 기둥이나 벽면이 화사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곳으로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 생활을 했던 건물이다.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사대부가와 궁궐의 특성을 고루 갖추다

노안당을 지나면 운현궁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노락당(老樂堂)이 있다.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한때는 궁궐처럼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당시 대제학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 치밖에 안 된다고 했던가.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노락당 왼편으로 돌아서면 안채인 이로당(二老堂)이 있다.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던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사대부가와 궁궐의 특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유물전시관이 마련되어 운현궁을 수리·복원하면서 발견한 유품과 생활 가구들을 전시한다.

운현궁 옆으로는 크림색의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이 있다. 조선 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하고 있는 이곳과 동떨어진 모습이 의아하면서도 유럽의 저택 같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운현궁 양관(洋館)이다. 가까운 거리인 듯하지만 지금은 운현궁이 아닌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소유다. 양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운현궁을 나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을 통해야 한다.

조선 후기 최고의 권력가들이 모여 개혁 정치를 도모했던 운현궁은 소규모의 사적으로 남아 있지만 여느 궁궐 못지않은 행사들이 열린다. 고종, 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국악 공연 등의 문화행사가 끊이질 않아 시민들의 전통 문화 교육장으로서 큰 몫을 하고 있다.

예절 교육 프로그램을 참가중인 학생들
운현궁에서 운영하는 예절 교육 프로그램


Address :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10
Tel : 02-766-9090
HomePage URL : http://unhyeongung.or.kr

왕맥이 흐르는 터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난과 역경의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경희궁 내 흥화문의 현 위치도 창건 당시의 자리는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보통 궁궐의 정문 안쪽에 세우는 다리다. 이로 보아 그 앞쪽에 흥화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에 해당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이 낡고 이전의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은 새롭게 지어 복원했다. 국왕이 공무를 수행하던 자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도 새로이 복원했다.

경희궁은 2002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뒤로 21세기의 후손들과 함께 다시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후 조금씩 궁궐의 위용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모습으로 옛 위상을 회복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興化門)

경희궁 숭정전
이전의 어려움으로 현재 동국대학교에 자리한 경희궁 숭정전


Address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Tel : 02-724-0274
HomePage URL : http://www.museum.seoul.kr/www/support/ghp/supportBranchGHPIntro.jsp

유려하지만 절도 있게

교대를 앞둔 두 무리의 수문군이 대한문 앞에서 마주한다. 카메라나 캠코더로 장면을 담기에 여념이 없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북소리가 울리기 전부터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은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으로 가득하다. 수문군을 빙 둘러 포위한 형세다. 엄고수(북을 치는 이)의 힘찬 손동작이 허공을 가른다. 둥! 둥! 둥! 세 번의 북소리. 수문장 교대의식을 알리는 개식 타고다.

수문장의 인솔 아래 궁 주변을 순찰하던 교대군이 궁성문에 도착한다. 의식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다. 엄고의 북소리가 울린다. 두 수문군의 가운데로 감독관에 해당하는 녹색 단령 차림의 승정원 주서와 궁성의 기물과 열쇠를 관장하는 액정서 소속의 사약이 나온다. ‘군호 응대!’ 하는 힘찬 울림이 퍼지면 양군의 참사가 군호를 확인한다. 군호는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종의 암호다. 병조에서 세 글자 이내로 국왕께 보고하면 승정원을 통해 내려온다. 승정원 주서가 동참하는 이유다. 승정원 주서가 수문장과 수문군에게 군호를 알려준다. 일말의 긴장감이 맴돌면서 관람객들이 의식의 절도를 느끼는 순간이다.

이어 ‘초엄’ 하는 참하의 외침에 따라 수문군들이 ‘초엄’을 복창하고 다음 의식이 이뤄진다. 교대의식의 첫 번째 절차를 알리는 신호로 나각과 나발 소리가 여섯 번 울린다. 주위를 환기시키는 신호다. 관람객들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본다. 수문군과 관람객 사이에 따로 구분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군악을 담당하는 취라척과 관람객은 최소한의 걸음만을 유지한 채 자리한다. 숨소리까지 다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다.

초엄, 중엄, 삼엄의 의식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 있는 약시함의 인계가 이뤄지며 본격적인 수문장 교대의식에 들어간다. 수문군의 참하가 수문장에게 약시함을 전달하는데, 약시함에는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 있다. 열쇠가 가지는 상징성은 의식에도 고스란히 스며든다. 이 과정을 승정원 주서와 액정서 사약이 지켜본다. 개개의 동작은 유연하지만 절도 있다. 영국의 근위병 교대의식과 비교하자면 부드러움 속에 격식의 꼿꼿함을 숨기고 있다. 보는 이들도 좀 더 쉽게 다가선다.

참하의‘중엄’ 하는 외침과 수문군들의 복창, 드디어 교대 의식의 두 번째 절차가 시작된다. 이를 알리는 나각과 나발 소리가 세 번 엄고를 울리면 양 수문장들이 인사 후 부신을 맞추고 순장패를 인수인계한다. 부신은 두 조각으로 나뉜 나뭇조각인데 둘이 이빨을 맞춰 한 짝을 이룬다. 일종의 신분 확인서다.

마지막 절차는 ‘삼엄’이다. ‘향전’이라는 외침에 따라 수문군들이 자리를 이동해 얼굴을 마주하는 ‘면간’ 교대의식을 치른다. 수문장들에 이은 수문군간의 교대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참하가 한 번 더 ‘향전’이라고 외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교대를 마친 수문군은 숭례문까지 순라를 한다. 교대의식은 총 20분 정도 소요된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지나가던 행인도 걸음을 멈추곤 한다. 이제는 서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식으로 서울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시 간 : 매일 오전11시, 오후2, 오후3시30분(일3회)
단, 월요일 및 혹서기ㆍ 영하 5℃ 이하의 혹한기, 눈 오는날, 비 오는 날은 행사가 쉽니다.

* 행사장소
- 덕수궁 대한문 : 왕궁수문장 교대 및 수위의식
- 덕수궁 ~ 보신각 순라의식 :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11:00 타임 후 실시

Address : 서울 중구 태평로1가 31
Tel : 02-120
HomePage URL : http://www.royalguard.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