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보존하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은 서울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먼저 종묘가 선정됐고 이어 창덕궁이 등재됐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이자 세계가 함께 보존하고 지켜가는 문화재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은 진정성과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전제로 한 10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 이상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창덕궁은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어진 궁궐로 전체 면적의 2/3가 북악산의 응봉산 자락에 있다. 산세를 적절히 활용한 궁궐인 셈이다. 창덕궁 후원의 가치가 각별한 이유도 이같은 자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건축과 조경의 특징이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에 의해 세워졌다.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장 오랜 시간 법궁(法宮)의 역할을 한 궁궐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창덕궁을 모두 잃었다. 그 후 경복궁은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방치됐고, 광해군 2년(1610)에 재건된 창덕궁은 약 270년간 조선의 법궁으로 쓰였다. 이웃한 창경궁과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고 사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 궁궐이 그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됐다.
1917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내전의 대부분이 손실되고 말았다. 이에 일제는 창덕궁을 복원한다는 미명 아래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서 사용했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을 허물어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 등을 지었다. 창덕궁과 경복궁을 동시에 훼손시킨 것이다. 순종의 승하 이후에는 더욱 심하게 훼손됐다. 창덕궁은 1991년에 들어서야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를 다시금 입증했다.
옥류천에서 낙선재까지
창덕궁은 1960년 일반에 개방했다. 하지만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3년간 폐쇄했고 1979년부터 오랜기간 안내원 제도를 시행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여타의 궁궐과 달리 안내원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자유로운 관람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창덕궁 관람이었다. 그러나 2010년 5월부터 관람제도가 바뀌어 현재는 자유로이 관람이 가능하다.
창덕궁은 크게 두 가지 관람 프로그램을 가진다. 첫 번째는 일반 관람이다.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을 중심으로 낙선재(樂善齋)까지 아우르는 기본적인 관람 코스다. 또한 안내원의 통제 없이 궁궐 곳곳을 자유로이 감상할 수 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쓰이던 공간이다. 검소한 헌종의 생활과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소박한 단청과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창살과 벽체 무늬가 두드러진다. 곁에 있는 석복헌(錫福軒)은 경빈의 처소로 궁궐 안에 후궁을 위해 건물을 지은 건 이례적이다. 낙선재에는 수강재(壽康齋)도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덕혜옹주의 거처였다.
두 번째는 후원 특별 관람으로 후원의 초입 부용지에서 후원의 백미 옥류천에 이르는 코스다. 후원은 창덕궁의 뒤편에 자리한 궁궐 정원으로 일제에 의해 비원(秘苑)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후원이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다. 북쪽에 있다 하여 북원(北苑)이라고도 한다. 후원의 아름다움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데에 있다. 생태계의 보존 상태가 좋고 연못과 정원 등에는 차경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옥류천은 그 제일 안쪽에 자리한 계곡으로 인조 14년(1636)에 소요암을 깎아내고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도 했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새긴 옥류천(玉流川) 세 글자가 또렷하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이 자리한다. 그 가운데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인 정자로 주변에는 왕이 직접 농사를 지은 논이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전경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Address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Tel : 02-762-8261
HomePage URL : www.cdg.go.kr
역사 공부와 운현궁 한 바퀴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를 지나면 대로에 긴 한옥 담이 보인다. 담 너머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조선 말 정치의 흥망성쇠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경복궁의 중건, 서원 철폐, 세도정치 개혁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원군의 섭정 10여 년 동안 사실상 조정(朝廷)과 같은 역할을 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곳으로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 말기의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이 보인다. 예전에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수직사(守直舍)다. 현재는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솟을대문 안쪽에는 노안당(老安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이 칠해 있지 않아 기둥이나 벽면이 화사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곳으로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 생활을 했던 건물이다.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사대부가와 궁궐의 특성을 고루 갖추다
노안당을 지나면 운현궁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노락당(老樂堂)이 있다.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한때는 궁궐처럼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당시 대제학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 치밖에 안 된다고 했던가.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노락당 왼편으로 돌아서면 안채인 이로당(二老堂)이 있다.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던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사대부가와 궁궐의 특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유물전시관이 마련되어 운현궁을 수리·복원하면서 발견한 유품과 생활 가구들을 전시한다.
운현궁 옆으로는 크림색의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이 있다. 조선 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하고 있는 이곳과 동떨어진 모습이 의아하면서도 유럽의 저택 같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운현궁 양관(洋館)이다. 가까운 거리인 듯하지만 지금은 운현궁이 아닌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소유다. 양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운현궁을 나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을 통해야 한다.
조선 후기 최고의 권력가들이 모여 개혁 정치를 도모했던 운현궁은 소규모의 사적으로 남아 있지만 여느 궁궐 못지않은 행사들이 열린다. 고종, 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국악 공연 등의 문화행사가 끊이질 않아 시민들의 전통 문화 교육장으로서 큰 몫을 하고 있다.
운현궁에서 운영하는 예절 교육 프로그램
Address :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10
Tel : 02-766-9090
HomePage URL : http://unhyeongung.or.kr
왕맥이 흐르는 터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난과 역경의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경희궁 내 흥화문의 현 위치도 창건 당시의 자리는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보통 궁궐의 정문 안쪽에 세우는 다리다. 이로 보아 그 앞쪽에 흥화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에 해당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이 낡고 이전의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은 새롭게 지어 복원했다. 국왕이 공무를 수행하던 자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도 새로이 복원했다.
경희궁은 2002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뒤로 21세기의 후손들과 함께 다시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후 조금씩 궁궐의 위용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모습으로 옛 위상을 회복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興化門)
이전의 어려움으로 현재 동국대학교에 자리한 경희궁 숭정전
Address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Tel : 02-724-0274
HomePage URL : http://www.museum.seoul.kr/www/support/ghp/supportBranchGHPIntro.jsp
유려하지만 절도 있게
교대를 앞둔 두 무리의 수문군이 대한문 앞에서 마주한다. 카메라나 캠코더로 장면을 담기에 여념이 없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북소리가 울리기 전부터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은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으로 가득하다. 수문군을 빙 둘러 포위한 형세다. 엄고수(북을 치는 이)의 힘찬 손동작이 허공을 가른다. 둥! 둥! 둥! 세 번의 북소리. 수문장 교대의식을 알리는 개식 타고다.
수문장의 인솔 아래 궁 주변을 순찰하던 교대군이 궁성문에 도착한다. 의식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다. 엄고의 북소리가 울린다. 두 수문군의 가운데로 감독관에 해당하는 녹색 단령 차림의 승정원 주서와 궁성의 기물과 열쇠를 관장하는 액정서 소속의 사약이 나온다. ‘군호 응대!’ 하는 힘찬 울림이 퍼지면 양군의 참사가 군호를 확인한다. 군호는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종의 암호다. 병조에서 세 글자 이내로 국왕께 보고하면 승정원을 통해 내려온다. 승정원 주서가 동참하는 이유다. 승정원 주서가 수문장과 수문군에게 군호를 알려준다. 일말의 긴장감이 맴돌면서 관람객들이 의식의 절도를 느끼는 순간이다.
이어 ‘초엄’ 하는 참하의 외침에 따라 수문군들이 ‘초엄’을 복창하고 다음 의식이 이뤄진다. 교대의식의 첫 번째 절차를 알리는 신호로 나각과 나발 소리가 여섯 번 울린다. 주위를 환기시키는 신호다. 관람객들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본다. 수문군과 관람객 사이에 따로 구분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군악을 담당하는 취라척과 관람객은 최소한의 걸음만을 유지한 채 자리한다. 숨소리까지 다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다.
초엄, 중엄, 삼엄의 의식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 있는 약시함의 인계가 이뤄지며 본격적인 수문장 교대의식에 들어간다. 수문군의 참하가 수문장에게 약시함을 전달하는데, 약시함에는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 있다. 열쇠가 가지는 상징성은 의식에도 고스란히 스며든다. 이 과정을 승정원 주서와 액정서 사약이 지켜본다. 개개의 동작은 유연하지만 절도 있다. 영국의 근위병 교대의식과 비교하자면 부드러움 속에 격식의 꼿꼿함을 숨기고 있다. 보는 이들도 좀 더 쉽게 다가선다.
참하의‘중엄’ 하는 외침과 수문군들의 복창, 드디어 교대 의식의 두 번째 절차가 시작된다. 이를 알리는 나각과 나발 소리가 세 번 엄고를 울리면 양 수문장들이 인사 후 부신을 맞추고 순장패를 인수인계한다. 부신은 두 조각으로 나뉜 나뭇조각인데 둘이 이빨을 맞춰 한 짝을 이룬다. 일종의 신분 확인서다.
마지막 절차는 ‘삼엄’이다. ‘향전’이라는 외침에 따라 수문군들이 자리를 이동해 얼굴을 마주하는 ‘면간’ 교대의식을 치른다. 수문장들에 이은 수문군간의 교대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참하가 한 번 더 ‘향전’이라고 외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교대를 마친 수문군은 숭례문까지 순라를 한다. 교대의식은 총 20분 정도 소요된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지나가던 행인도 걸음을 멈추곤 한다. 이제는 서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식으로 서울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시 간 : 매일 오전11시, 오후2, 오후3시30분(일3회)
단, 월요일 및 혹서기ㆍ 영하 5℃ 이하의 혹한기, 눈 오는날, 비 오는 날은 행사가 쉽니다.
* 행사장소
- 덕수궁 대한문 : 왕궁수문장 교대 및 수위의식
- 덕수궁 ~ 보신각 순라의식 :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11:00 타임 후 실시
Address : 서울 중구 태평로1가 31
Tel : 02-120
HomePage URL : http://www.royalguard.or.kr/